여행 두 번의 여파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지경이 되어 나름대로 결심을 했다. 내 지출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책 구매, 배달 음식, 커피숍에서 사 먹는 음료 세 가지에 대한 지출을 줄이겠다고. 하지만 그 고민과 동시에 최근 알라딘에서 현대문학 단편선 전자책 세트를 세일하는 것에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단편을 좋아해서 눈독을 들이고 있던 목록이 상상 이상의 저렴한 가격에 나왔으니 흔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수밖에. 그래서 1년간 필수품 외에 쇼핑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폴이 마지막으로 코끼리 정원 장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결제하듯, 나 역시 큰 맘 먹고 현대문학 단편선 전자책 세트를 결제했다.
그런데 비염 약에 취해 누워 있다 일어나 휴대전화를 보다가 보름쯤 줄 전자책 할인 쿠폰을 이용해 이 세트를 더 싸게 살 수 있다는 글을 보고는 괜찮다고 생각한 내 구매가 후회되기 시작했다. 세일에 혹해 관심도 없던 것을 산 것도 아니고, 눈독을 들여오던 것이 저렴한 가격에 풀린 것을 보고 나름대로 포인트까지 꼼꼼히 챙겨서 구매해 놓고 더 싸게 살 수 있다는 정보에 속상해 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이 날 도서관에 반납한 ‘굿바이 쇼핑’ 저자가 쇼핑에 환멸을 느끼고 쇼핑과 ‘굿바이’를 하기로 한 심정이 이해가 됐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제는 물건을 제값주고 사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조금만 알아보면 같은 물건을 더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넘쳐나고 그렇게 본래 가격보다 월등히 저렴해(보이는) 구매를 하면 잠시나마 ‘개이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본래 할인이니 쿠폰이니 하는 것은 아무리 잘 챙기려 해도 나보다 더 잘 챙기는 꼼꼼한 이들이 나오는 법이고, 시기에 따라 최선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게 되는 경우도 많으니 만족스런 소비가 후회로 변하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세일에 혹해 구매한 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세상에 좋은 물건은 넘쳐나니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족하며 살 것 같지만 거기에는 일종의 정신승리가 늘 따라다닌다. 신제품을 먼저 사면 곧 세일을 시작하니 먼저 산 사람들은 먼저 샀음에 만족해야 한다. 세일하는 품목을 사면 곧 더 좋은 물건이 비슷한 가격에 나타나니 그나마 싸게 샀음에 만족해야 한다. 나 역시 ‘대여도 아닌 것이 그 가격이면 이미 충분히 저렴한 가격이야’하며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다. 소비자로 살면 영원히 만족이 없다는 것을.
돈만 있으면 누릴 수 있는 게 많다. 하지만 소비로 만족을 얻으려면 대체 얼마나 많이 벌어야 할까? 프리랜서로 살면서 돈을 많이 번다는 건 무지하게 바쁘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을 읽고 싶어도 읽을 시간이 없고, 아파도 제대로 쉴 시간이 없다. 그게 정상인가?
쇼핑을 끊은 1년 동안 폴과 나는 시민으로의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얻었다. 게다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필요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가게와 식당으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킨 우리들이 머물 곳이라곤 오래된 공공장소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놀랍고도 풍성한 여러 가지 것들을 보았으며, 공공자산들이 심각하리만치 형편없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도서관, 학교, 다리는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
저자인 주디스의 노 쇼핑 프로젝트 기간 동안 미국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선되던 선거) 저자가 소비자에서 시민으로의 전환을 생각한 배경에는 그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 역시 내 삶과 정치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뒤라 이 부분이 가슴에 박혔다. 개인이 소비자로서 살지 않으려면 공공부문이 회복되어야 했던 것이다. 저자 역시 소비자로 사는 동안엔 미처 깨닫지 못했고 나 역시 정치와 삶의 관계에 무지했던 과거에는 눈치 채지 못했던 사실이다.
민주주의 참여라는 전동장치가 삐걱거리다 멈추는데, 누구도 그것을 고치려고 나서거나 고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세금감면의 열병이 보수주의 재정정책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징표다. 미국의 예산 파산과 망가진 기반시설은 공공선의 약속이 깨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공공선은 만인의 이익을 위한 제도나 물건이 개인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우선하며,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일용품을 팔아서 벌어들이는 돈의 가치에 우선해야 한다.
공공부문의 보수가 시급한 상황에서 의료보험이나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즐거움과 생계, 지역사회를 추구하려면 이제 개인 소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공공선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게 돼버린다. 그리고 돈벌이와 관계없는 성취를 좇는 폴과 나 같은 사람은 월마트를 향해 말을 타고 돌진하는 돈키호테나 다름없다.
시민의식은 이러한 그림 전부를 바꿔놓는다. 이것은 환경 파괴와 노동착취, 공유재산의 민영화, 욕구와 만족의 상품화를 거부하는 문화와 경제를 위한 정책과 운영을 요구한다는 의미다.
이번에 발표된 부동산 대책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과 무관하지만 가까운 사람 중에는 이 대책으로 직격탄을 맞은 사람도 있다. (내가 알기로 그는 강남 4구에만 부동산이 여럿 있다.) 나는 ‘어차피 증세 없는 복지는 헛소리이며, 복지 국가로 가길 바란다면 증세는 트렌드이니 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도 먼저 맞는 셈 치고 감내하라’고 했다. 그는 내가 같은 입장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을 거라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나는 내가 설령 소득세를 천만 원쯤 낸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란다.
저자의 노 쇼핑 실험은 극단적이고, 때로는 답답하기까지 하다.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즘 혹은 단순한 삶에 비교하면 이 책은 궁상맞고 찌질하다. 그래도 나는 ‘심플’을 ‘가난’으로 옮긴 이 책의 해석이 마음에 든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럭셔리 소비를 조장하는 것보다야 훨씬 현실적이고 건설적이다. 일지인 만큼 정신없고 산만해서 읽기 좋게 쓰인 책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경험과 어우러져 좋은 시기에 잘 읽은 책이 됐다. 이어서 ‘완벽한 가격 CHEAP’을 읽으면 참 좋을 것 같다. (이래서 내 머리맡에 책이 자꾸 쌓인다;;;)
(2017년 8월 4일에 감상문 써둔 파일을 컴퓨터에서 찾아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