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서류로 파트너십 신고만 한 건데 그런 말까지 들으니 민망하네. 아무튼 고마워.”
정말로 끝이었다. 여러 사건 사고를 겪으며 원숙미를 갖춘 제임스 T. 커크 함장은 여전히 소년처럼 웃었다. 함장이 결혼 특별 휴가로 자리를 비우는 며칠 간 엔터프라이즈호는 요크타운 행성 기지에서 보급 겸 점검을 하기로 했다. 일등 항해사인 스팍은 제임스와 상륙 허가 계획을 논의하고 함장실을 나왔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인공 중력이 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스팍 중령님.”
“마커스 대위.”
몸을 돌리자마자 마커스 대위와 마주쳤다. 고위 장교들의 선실이 위치한 갑판의 복도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조용했다. 엔터프라이즈호의 하얀 선체 덕에 마커스 대위의 금발 머리가 더욱 돋보였다. 스팍이 한 발짝 비켜섰다. 마커스 대위가 함장실의 출입 허가 버튼을 눌렀다.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저희 때문에 일이 늘어서 죄송해요.”
함장을 곁에서 보좌하며 원활한 임무 수행을 돕는 것은 일등 항해사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임신 중인 과학부 소속 장교의 근무 시간을 조정하고 인력배치를 하는 것도 수석 연구 장교의 일이었다. 스팍은 캐롤 마커스 대위가 사과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스팍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마커스 대위가 살짝 미소를 짓는 사이에 함장실 문이 열렸다. 마커스 대위가 들어가고 다시 함장실 문이 닫혔다.
– – –
‘당장 부서져도 이상할 게 없는 스노 글로브 같잖아.’
다시 한 번 요크타운에 접근하는 동안 스팍은 몇 년 전 맥코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맥락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단순하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때로 인간의 직감이 벌칸인의 논리적 사고를 앞지를 때가 있었다. 시선을 느낀 스팍이 고개를 돌렸다. 맥코이였다.
“닮은 것 같아.”
스팍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저거랑 너.”
“행성 기지와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할 대상이라고 볼 수 없어요.”
“그런 소리 할 줄 알았다.”
맥코이가 입술을 비쭉거렸다. 하지만 맥코이는 뜻을 굽힐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제임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중얼거리는 소리였지만 인간보다 청력이 뛰어난 스팍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함장까지 그렇게 말한다면 생각해 볼 가치가 있었다. 요크타운에서 하선할 생각이 없는 스팍에게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요크타운에 도킹을 완료하고 하선 안내 방송을 마친 제임스가 함장석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 없는 동안 우리 배 잘 부탁해.”
“배웅하겠습니다.”
스팍이 함장의 뒤를 따르려는데 제임스가 괜찮다며 손을 들었다.
“어차피 캐롤이랑 준비할 게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우후라나 배웅해 줘.”
논리정연한 말에 스팍은 함장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우후라가 다가와 스팍의 소맷자락을 살짝 쥐었다.
“나랑 같이 요크타운 중앙 도서관에 가보지 않을래요? 지금 쓰는 논문 때문에 참고 자료 찾으러 갈 건데, 당신도 요즘 쓰고 있는 논문 있지 않았어요?”
“내 논문은 이미 완성 단계라 난 괜찮으니까 논문에 집중해요. 보편 통역기에 신체 언어 감지 기능을 탑재할 수 있다면 더욱 정확한 통역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테니 기대가 돼요.”
“개인차 때문에 발생하는 오차를 줄이는 게 관건이에요. 뭐, 결국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면 해결 될 문제긴 하지만요.”
학문을 사랑하는 둘은 연구자로서 수시로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다 연인이 되었다. 둘은 서로를 존경하고 아꼈다. 스팍은 성실한 연인이었다. 다만 스팍이 줄 수 있는 마음이 우후라가 원하는 크기와 달랐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먼저 깨달은 우후라가 이별을 고했다. 정확하게는 관계를 재정립했다. 이제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한 친구였다. 겉으로 보기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다만 연인 간에 행하는 입맞춤과 같은 스킨십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끔 이유 모를 화를 내던 우후라가 종종 스팍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는 것이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었다.
“바래다줘요.”
우후라가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래요.”
술루와 체콥을 비롯해 많은 선원들도 요크타운 행성 기지에서 상륙 허가를 보내기로 했다. 논문의 참고 자료를 찾는다며 요크타운 중앙 도서관과 엔터프라이즈호를 오가는 우후라를 포함해도, 엔터프라이즈호를 하선하지 않는 선원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우후라를 배웅하러 간 터미널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욱 붐비는 듯했다. 하선한 엔터프라이즈호의 선원들 때문이라고 해도 유난히 사람이 많아 보였다.
“아, 함장님이 하선한다는 소문이 퍼졌나보네요.”
“함장님을 보러 온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입니까?”
함장의 하선을 막으려는 생각에 급히 뛰어가려는데 우후라가 스팍을 말렸다.
“함장님은 셔틀을 타고 셔틀 착륙장 B로 가셨어요.”
스팍이 우후라를 쳐다보았다.
“캐롤이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한대요. 함장님이 부탁하셔서 한산한 셔틀 착륙장을 수배해 드렸거든요.”
논리적이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스팍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던 몸에 맥이 풀렸다.
“같이 식사라도 할래요? 엔터프라이즈호로 돌아갈래요?”
“엔터프라이즈호에 돌아갈게요.”
“그래요.”
우후라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곧은 자세로 걸어갔다.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마음을 끄는 데가 있는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스팍의 생각은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로 향했다. 우후라의 뒷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던 스팍은 돌아서 엔터프라이즈호로 향했다.
– – –
결혼 휴가만큼은 단둘이 보내고 싶다는 캐롤의 의견을 따라 짐은 호숫가 근처에 있는 독채형 호텔을 예약했다. 임신 후 쉽게 피곤해 하던 캐롤은 금세 잠이 들었다. 짐은 잠든 캐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흐트러진 금발 머리를 정돈하듯 쓰다듬었다. 칸 사건 이후 캐롤은 본래 일하던 연구소로 돌아가지 못했다. 영광스럽게 사망한 짐의 아버지와 달리, 캐롤의 아버지가 죽은 건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 전말을 전부 지켜본 캐롤은 끊임없이 악몽을 꾸었다. 칸의 혈청으로 살아난 짐도 워프 코어 앞에서 괴로워하며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두 사람은 몇 개월간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상담실을 오가며 시간이 맞으면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잠들지 못하는 밤을 함께 보내며 몸을 섞기도 했다.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임신은 두 사람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남녀 공히 피임약 사용이 흔한 시대였다. 칸의 혈청으로 바뀐 체질 때문에 상용하던 피임약이 듣지 않게 된 짐과 우울증 때문에 피임약 복용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캐롤 누구도 서로를 원망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캐롤이 아이를 낳겠다고 하자 편모 가정에서 외롭게 자랐던 짐이 청혼을 했다. 뜨겁게 두근거리는 사랑을 줄 자신은 없지만, 가족으로서 애틋하게 아낄 수는 있다고 했다. 좋은 남편은 되지 못하겠지만,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공동 육아 파트너십을 맺자고 제안한 건 눈치가 빠른 캐롤이었다. 두 사람에게 가능성을 열어두자고 했다. 그래서 짐은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사라진 행성 벌칸의 보카야 목걸이를 보고 쓴웃음을 짓는 일도 줄어들었다. 가끔은 캐롤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원망스럽다는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스팍을 볼 때마다 차라리 자신의 마음이 식어 버리길 바랐다.
“계속 그러고 있었어?”
캐롤의 목소리에 짐이 눈을 깜박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창밖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짐이 캐롤의 머리맡에 놓인 제 손을 거뒀다. 어깨가 조금 욱신거렸다.
“그랬나봐.”
“경치라도 구경하지 그랬어.”
“그러게. 내일 보지, 뭐. 시간도 많은데. 배 안 고파?”
“조금?”
캐롤이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켰다. 짐은 자연스레 손을 뻗어 캐롤을 도왔다. 캐롤이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짐도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오늘은 피곤하니까 그냥 호텔에서 먹자.”
“좋은 생각이야.”
주로 지상 근무를 했던 캐롤은 유난히 함선 음식을 지겨워했다. 어릴 때부터 요리를 해야 했던 짐은 남이 해 주는 음식이라면 다 좋아하는 편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면 캐롤이 식당으로 안내하고 짐은 별다른 말없이 맛있게 먹었다. 그게 두 사람의 데이트라면 데이트였다. 어린 나이에 함장이 된 짐은 캐롤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만 다니는 게 싫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보기보다 맛이 없었다. 그래도 만족한 듯한 캐롤의 미소에 짐은 묵묵히 접시를 비웠다.
– – –
함장보다 휴가가 짧은 선원들의 일과를 책임지고 감독하는 건 휴가를 받지 않은 스팍의 일이었다. 함장의 휴가로 선원들의 근무량이 줄어든 덕분에 함선이 운항 중이었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스팍도 여유가 있었다. 연일 보도되는 함장 부부의 신혼여행은 평범했다. 때가 되면 식사를 하고 경치 좋은 곳을 산책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사진이 찍히는가 하면, 함장 혼자 걷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다.
“사찐 보셨씀미까? 요쯤 함짱님 믓있씀미다.”
“함장님은 언제나 멋있는 분입니다.”
“아님미다. 쫌 다름미다.”
함교 선원들은 함께 식사를 할 때가 많았다. 체콥은 식당에서 가장 널찍한 식탁에 앉아 호들갑스레 함장의 이야기를 했다. 함장만큼은 아니어도 함교 선원들은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었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선원들을 스팍의 눈치를 보며 함교 선원들을 흘끔거렸다.
“그 멍청이가 멋있다니, 도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거야?”
식판을 들고 등장한 맥코이의 발언에 스팍이 눈썹 하나를 들어 올렸다.
“설마 함장님을 멍청이라고 하신 겁니까?”
“왜, 아니꼽습니까?”
“상관을 지칭하기엔 부적절한 호칭입니다.”
“난 짐을 친구로 안 시간이 더 길거든? 내가 멍청이를 멍청이라고 하겠다는데 왜 시비야?”
스팍과 맥코이의 시시한 말싸움에 주변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체콥도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맥코이에게 전자패드를 꺼내 보였다. 이른 아침 호숫가를 배경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짐의 사진이었다. 푸른 눈과 호수가 함께 어우러져 그럴싸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다들 오, 하며 감탄하는 중에 맥코이는 혀를 찼고, 스팍은 숨을 멈췄다.
“새벽부터 호숫가 산책이라니. 신혼여행인데 우리 함장님은 체력도 좋아.”
“캐롤 대위가 임신 중이잖아.”
“아, 그런가?”
선원들끼리 키득대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스팍은 다 비우지 않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일 함교에서 봅시다.”
벌칸인의 표정을 읽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엔터프라이즈호의 선원들은 벌칸인 부함장의 심기를 읽을 줄 알았다. 친구라지만 대놓고 상관을 멍청이라고 한 맥코이부터 함장의 침대 사정을 놓고 낄낄거린 선원들까지 스팍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후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우아하게 인공 야채로 만든 샐러드를 씹어 삼켰다.
“확실히, 바보 같긴 하지만 멋있긴 하네요.”
“역시 므시쬬?”
“그래봤자 멍청이라니까.”
체콥과 본즈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하자 스팍이 없는 식탁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 – –
스팍은 욕실에서 얼마 먹지도 않은 음식을 게워냈다. 아무래도 식사 시간에 겪은 불쾌한 감정이 소화 능력에 영향을 끼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벌칸인답지 않은 일이었다. 최근 들어 감정에 영향을 받는 일이 늘었다. 스팍이 샤워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엔터프라이즈호에 승선한 이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벌칸 행성이 사라졌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며 또 다른 자신을 만나기도 했다. 존경하던 상사가 사망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고, 생각해보면 현재 자신의 함장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또 다른 자신이 죽은 것도 최근 일이었다. 생사가 위험할 정도의 큰 부상을 입고 회복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벌칸인이 아니었다면 정상 근무 자체도 불가능했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양치를 하고 선실로 돌아와 명상을 준비했다. 수석 연구 장교와 일등 항해사라는 두 가지 중책을 겸임하는 스팍에게 모처럼 생긴 여유였다. 명상을 통해 자신을 다잡을 생각이었다. 향초를 켜고 명상용 매트에 앉아 눈을 감자 아까 식당에서 사진으로 봤던 함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팍이 짧게 숨을 들이쉬고 눈을 떴다. 휑한 선실벽을 한참 바라보던 스팍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휴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임시 함장의 휴가를 승인할 수 있는 건 휴가 중인 함장뿐이었다. 명상 도구를 정리하려는데 승인된 휴가 신청서가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함선 시각으로 새벽 2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 – –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건강을 위해 이만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짐은 짤막한 스팍의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었다. 짐이 전자 패드를 두드려 회신했다.
「그러는 넌 왜 아직 안 자는데? 벌칸인이라 적게 자도 된다는 말은 됐고, 내가 휴가 승인을 안 해 줬으면 어쩌려고. 원래대로라면 내일 알파 근무잖아.」
「자려던 참입니다.」
「근데 갑자기 웬 휴가야?」
「신청서에 쓰여 있는 대로 개인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궁금하다는 거잖아.」
스팍은 답이 없었다. 짐은 역시나란 표정으로 일어나 방 안에 놓인 책상 위에 전자 패드를 내려놓았다. 스팍은 자기 일에 관해서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짐도 마찬가지라서 스팍을 다그칠 수도 없었다. 터보 리프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서로에게 하려던 말은 여전히 짐작인 채로 남았다. 스팍과 우후라가 헤어진 이유는 모르지만, 스팍이 먼저 이별을 고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팍은 다가오는 사람을 막지도, 떠나는 사람을 잡지도 않았다. 스팍이란 별에서 꼭 한 걸음만큼 떨어져 공전하는 위성처럼, 짐은 스팍에게 다가가지도, 스팍에게서 멀어지지도 못했다. 짐은 자신의 아이를 품은 여자가 자고 있는 방에서 다른 이를 생각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 – –
함장 부부가 짧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보얗게 핀 얼굴을 본 스팍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뾰족한 말이 나갔다.
“체중이 느셨군요.”
함께 표정을 굳히는 닮은 듯한 두 사람의 모습이 불편했다. 짐이 마커스 대위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며 토닥였다.
“휴가 중엔 운동을 안 했더니 살이 좀 붙었나봐. 그나저나 아무리 우리가 친하다지만 그런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 아니야? 이거 참, 운동 좀 해야겠네.”
마커스 대위를 감싼 제 함장의 손에서 결혼반지가 반짝였다. 뭐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멍해진 스팍이 눈을 깜박였다. 함장을 바라보니 함장의 눈이 매서웠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봐. 자기는 몸 관리도 해야 하는 입장인데.”
“무슨 소리야. 내가 쪄봐야 얼마나 쪘다고.”
마커스 대위에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함장의 체중은 약 2.54kg 정도 증가해 있었다. 스타플릿 제복을 입고 있다면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입을 떼려다가 더욱더 사납게 자신을 바라보는 함장의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으면 웃어줄 함장의 굳은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끄러미 함장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니 마커스 대위가 급히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그럼 내일까지 수고해줘. 그간의 업무 보고는 내일 오전에 받을게.”
목소리는 밝았지만 함장은 끝까지 웃지 않았다. 함장이 걸음을 떼자 스팍은 자연스레 함장의 뒤를 따르려다 멈춰 섰다. 스팍이 멈춰서는 바람에 스팍에게 살짝 부딪힐 뻔한 마커스 대위의 어깨를 함장이 감싸 안았다. 뒷짐을 지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이 전송실을 떠나는 모습을 본 스팍도 함교로 향했다. 마커스 대위를 감싸던 함장의 손과, 대위에게 웃어주던 얼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문득 마커스 대위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함장은 어수선한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커스 대위를 의심하기는커녕 호의를 보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당시 함장이 마커스 대위에게 맹목적으로 호의를 보인 데는 자신의 탓도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일을 곰곰이 생각해 봐도 스팍은 함장에게 질책 아닌 질책을 받을만한 실수를 한 기억이 없었다. 선원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함장은 말실수를 했다고 사납게 질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휴가를 가기 전까지도 자신에게 웃어주던 함장이었다. 그날 스팍은 함장이 변한 이유를 생각하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 –
“급히 휴가를 냈던 것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궁금하긴 했지만 캐물을 생각도 없던 짐은 뜬금없는 스팍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스팍의 표정이 다급했다. 짐이 미간을 찌푸렸다.
“개인적인 일이라며. 물어도 대답이 없어서 말할 수 없는 이유인가보다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아닙니다.”
“그럼 뭔데?”
스팍이 머뭇거렸다. 스팍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짐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말하기 힘들면 말 안 해도 상관없어.”
“말과 행동이 다르시군요.”
“뭐?”
짐은 스팍의 말에 기가 막혀 화가 치밀었다가 나중에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비난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스팍이었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어이가 없어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네가 왜 휴가를 냈는지 들을 생각 없으니까 난 이만 함교로 가볼까 하는데.”
스팍의 눈에 불길이 이는 게 보였다. 짐이 못 본 척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자 스팍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뭐하는 거지, 중령?”
짐이 제 앞을 막아서는 스팍에게 으르렁거렸다. 그래도 스팍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뻗어 나왔다가 곧 스팍의 등 뒤로 사라진 스팍의 손 하나가 못내 슬펐다. 차라리 자신의 멱살을 쥐고 화를 내면 좋을 것을, 원망스런 표정으로 물러나는 스팍을 보니 맥이 풀리고 말았다.
“어제 일 때문이라면 안 그래도 신경 쓰이던 걸 네가 눈치 없이 캐롤 앞에서 지적해서 그런 거니까 잊어버려. 신혼 여행도 여행이라고 좀 피곤해서 그런가 나도 좀 과하게 반응하긴 했으니 서로 비긴 걸로 하자고.”
“함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팍은 전혀 납득한 표정이 아니었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되는 대로 갖다 붙인 이유였다. 스팍이 지금처럼 짐을 뒤흔들지만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아직 업무를 시작하기 전인데도 피곤함이 밀려왔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커피로 해결될 피로가 아닌 걸 알면서도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아무 말 없이 휴게실로 향하는 제 뒤를 따르는 발걸음에 짐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 – –
아침부터 피곤한 사람은 또 있었다. 죽을상을 하고 휴게실로 걸어오는 짐과 그 뒤를 따르는 시퍼런 덩치를 본 맥코이였다.
“어제는 좀 얼굴이 좋아 보이더니 하루 사이에 왜 죽을상이야.”
“알면서 묻지 마. 나도 커피.”
스팍은 아무 이유도 없이 함장을 따라온 자신이 의아했다. 하지만 휴게실까지 따라와 놓고 갑자기 돌아가는 것도 이상해서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맥코이가 스팍을 흘끔 보더니 함장을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익숙한 일인데 신경에 거슬렸다.
“당신은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맥코이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는 지적은 정확했지만 그게 뭔지 스팍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썹 하나만 치켜 올리고 말았다. 맥코이가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다 점심에 캐롤 대위 검진이 있어. 초음파 촬영하는 날이니까 같이 와.”
“…그래.”
맥코이가 한숨을 쉬더니 다시 한 번 함장의 어깨를 두드리고 자리를 떴다. 함장도 남아 있던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 자신의 2세 이야기를 들으면 표정이 밝아지기 마련인데, 함장의 표정이 좀처럼 밝지 않은 게 걱정이 됐다. 함장이 스팍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어쩔 줄을 모르는 게 꼭 뭐 마려운 강아지 같네.”
“절 비하하는 말은 불쾌합니다.”
“귀엽다는 뜻이야.”
“성인 남성에게 귀엽다고 하는 것이 비하가 아니라는 뉘앙스군요.”
“에휴, 네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미안해. 됐어?”
“네, 사과하셨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함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함장의 미소에 초조하던 마음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며칠 전처럼 전날 밤에도 제대로 된 명상을 하지 못했던 스팍은 함장의 미소 하나에 마음의 평화를 얻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 – –
캐롤의 초음파 검사를 하는 의무실은 조용했다. 짐도 캐롤도 말이 없었고 의사로서 설명하는 맥코이조차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잔뜩 눈치를 보는 캐롤 때문에라도 뭔가 입을 열어야 하는데 보이지도 않는 깊은 물에 가라앉아 죽어가는 짐은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태아의 형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에 반응하듯 태아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이목구비는 구분할 수 없어도 분명 자신의 아이였다.
“…많이 컸네.”
긴장하던 캐롤이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웃는 얼굴이 까칠했다. 미안한 마음에 돌린 시선이 이제는 조금 볼록해진 캐롤의 배로 향했다. 괜히 멋쩍어 헛기침을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간단한 거라면 내가 직접 만들어 줄게.”
“진짜? 나 토마토 스파게티 먹고 싶었는데.”
“그 정도라면 해 줄 수 있지. 있다 저녁에 해 줄게.”
짐은 침대에서 내려서는 캐롤을 부축했다. 맥코이는 검진 기구를 정리하느라 분주한 척 하며 애써 두 사람을 무시했다. 맥코이의 배려에 짐도 짐짓 모르는 척 인사했다.
“그럼 우리 간다.”
“어, 그래. 맛있는 거 많이 해 줘라. 애는 자라는데 산모 체중이 줄어서야 되겠냐.”
“그래.”
캐롤이 괜찮다는 듯 짐의 손을 잡으며 씩 웃었다. 참 강한 여자였다. 짐이 피식 웃고는 캐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럼 근무 잘 해.”
“당신도.”
캐롤을 먼저 보내고 돌아서니 파란 셔츠를 입은 익숙한 인영이 먼발치에 서 있었다. 스팍이 그림자처럼 제 곁을 지킨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한숨대신 환하게 웃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팍을 보고 더 크게 웃었다.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 – –
웃는 함장의 모습이 낯설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함장에게 급히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함장의 웃음이 멎었다. 물기 어린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을 뻗지 않으려 뒷짐 진 손을 꼭 잡았다.
“괜찮으신 겁니까?”
“응, 난 괜찮은데 넌 왜 그런 표정이야?”
그런 표정이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어떤 표정입니까?”
“응?”
“대부분의 지구인들은 제게 표정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후라 대위와 함장님만은 제게 왜 그런 표정이냐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제 표정이 어떻습니까?”
여러 가지 표정이 미처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함장의 얼굴에 스쳤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어깨를 두드리며 지나치는 함장의 말은 어째서인지 평소처럼 위로가 되지 않았다. 잰 걸음으로 함장을 따랐다.
“저녁에 시간 되십니까?”
“안 돼.”
“왜 안 되는지 여쭤 봐도 됩니까?”
함장이 돌아섰다.
“캐롤이랑 선약이 있어.”
“마커스 대위와는 매일 저녁 뵙는 사이잖습니까.”
“그래서?”
어쩐지 함장의 분위기가 이상했지만 스팍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마커스 대위와의 선약은 뒤로 미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안 돼.”
“함선에 관해 긴히 상의드릴 게 있다고 해도 말입니까?”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자꾸 볼멘소리가 되는지 스팍은 알 수가 없었다.
“함선 문제라면 네가 이럴 리 없지.”
“도대체 제가 어떻다는 겁니까?”
“초조하고 답답하잖아. 네가 함선 문제로 그런 적 있어? 곧 근무 시작하니까 그때까지 정신 차릴 자신 없으면 교대자 보내고 오후 근무는 쉬도록 해.”
“함장님께서는 다 아신다는 말투시군요.”
“글쎄. 내 마음도 잘 모르겠어, 이젠.”
함장이 자리를 뜨자 스팍은 커다란 미로 한가운데에 선 기분이 들었다. 엔터프라이즈호의 깨끗하고 하얀 격벽과 이미 눈감고도 익숙한 복도가 낯설었다. 현기증을 느낀 스팍은 급히 눈앞의 의무실로 향했다.
– – –
마커스 대위의 검진 결과를 정리하던 맥코이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더욱 하얗게 질린 채 걸어 들어오는 스팍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스팍은 나사라도 하나 빠진 듯 얼빠진 얼굴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 꼭 지금처럼.
“그건 함장님의 아이 사진입니까?”
스팍이 가리키는 건 맥코이의 모니터에 비친 짐의 2세 사진이었다.
“어? 아, 응. 왜, 설마 짐을 닮았다는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정말 함장님의 아이가 맞습니까?”
“이건 또 무슨 새로운 헛소리야? 지금 마커스 대위를 의심하는 거야?”
“…아닙니다.”
맥코이는 습관처럼 검사 도구를 스팍에게 들이댔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어디가 아픈가 보려고. 당신이 아프지도 않은데 의무실에 왔겠어? 짐도 없는데?”
말해놓고 보니 짐도 없는데 스팍이 의무실에 달려올 이유가 없었다. 좀 더 꼼꼼히 검사해 봤지만 맥박이나 체온이 정상 수치 범위 안에서 미세하게 높은 편인 것 말고는 큰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특별히 이상은 없는데. 증상이 뭔데?”
“경미한 어지럼증입니다.”
“그래? 잠깐만 역시 피를 뽑아봐야겠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의사인 내가 결정해.”
맥코이는 재빨리 스팍의 혈액을 채취했다. 그럴 필요 없다던 스팍은 맥코이가 혈액을 채취해 검사기에 돌리는 내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해?”
“함장님이 좋아했겠군요.”
“응? 아, 아직 실감이 안 나는 것 같아. 당신네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인간 남자들은 대부분 다 그렇거든. 나도 그랬고.”
“그렇군요.”
“왜, 당신도 2세가 갖고 싶어?”
맥코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눈을 감아버리는 스팍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혈액 검사 결과는 앞으로 30분은 더 걸릴 터였다.
– – –
혈액 검사 결과는 당연히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스팍은 반나절 병가를 신청했다. 스팍의 뜻이기도 했지만 스팍을 이상하게 여긴 맥코이가 주장한 것이기도 했다.
‘왜, 당신도 2세가 갖고 싶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팍 대사의 사망 이후 스타플릿을 그만 두고 신 벌칸에서 종족을 위해 헌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 중에는 종족 번식을 통해 인구를 늘린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결정적으로 스팍의 결심을 바꾼 건 스팍 대사의 유품 속 사진이었지만 네가 없으면 자신은 어떻게 하냐는 제 함장의 말도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그때만 해도 제 함장 곁에는 역시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제대로 된 인간도, 제대로 된 벌칸인도 아닌 자신 쪽이야말로 함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스팍 대사조차 없는 지금은 온전한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함장 하나뿐이었다. 우후라가 노력해도 할 수 없었던 것을 함장은 처음부터 자연스레 하고 있었다.
함장이 마커스 대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함장이 제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함장이 웃었다. 함장이 울었다. 함장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함장이 시선을 돌렸다. 함장이. 함장이. 함장이. 속이 울렁거렸다. 화장실로 향했다. 코를 찌르는 토마토소스 냄새에 스팍은 고통스럽게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속을 비우고 또 비웠다. 짐. 짐. 짐. 쪼그려 앉아 눈을 감으니 짐의 아이가 원망하듯 자신을 바라보았다. 짐이 원망하듯 자신을 바라보았다. 헉 하며 스팍이 눈을 부릅떴다. 스팍의 눈이 번들거렸다. 스팍은 휘청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입을 헹구고 침대에 몸을 내던지듯 쓰러졌다. 당신이 없으면 난 어떡하죠, 짐?
스팍이 짐에게 당신 없으면 어떡하냐고 말했으니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