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커크] Make Me Wonder -1-

스팍은 합리적인 결정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주요 구성원이 벌칸인으로 구성된 팀인 VSA(Vulcan Speed-racing Association ; 벌칸 스피드레이싱 협회)는 세컨드 드라이버인 스팍에게 팀 오더를 자주 내리곤 했다. 팀 오더를 통해 퍼스트 드라이버인 스톤에게 더 좋은 순위를 양보한 결과가 기대 이하일 때도 많았다. VSA가 팀 오더를 내릴 때마다 자신의 팬들이 분통을 터뜨리더라도 스팍은 그저 퍼스트 드라이버와 세컨드 드라이버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는 게 팀 차원에서는 합리적인 모양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물론 스팍도 순위를 경쟁하는 레이싱 팀이 더 좋은 순위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일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VSA는 그 이름부터 벌칸인임을 당당히 드러내는 팀이었다. 지구의 Formula 1에서 착안해 은하 연방의 다양한 종족이 한 자리에 모여 레이싱이라는 형태로 경쟁하는 자리인 Formation 1 대회, 줄여서 F1은 본래 다양한 종족이 건전하게 경쟁하며 우주 탐사를 위한 기술력을 시험하는 자리이자, 서로 다른 종족이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회였다. 그런 F1에 참가하는 팀 이름에 당당히 종족을 표시하는 일은 타 종족을 배척하거나 종족주의를 강화하는 뜻으로 비춰지기 십상이기 때문에 오해를 감수하고서도 종족의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는 VSA같은 팀은 드물었다. 인간과 벌칸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이 5년이나 그런 VSA의 세컨드 드라이버로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실력이 혈통의 불리함을 극복할 정도는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스팍은 세컨드 드라이버임에도 예산을 이유로 퍼스트 드라이버보다 낮은 사양의 차를 타거나 업그레이드가 늦어지는 일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제 아버지 사렉의 경제력 덕을 보긴 했겠지만, 적어도 그 점에서 VSA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줄 아는 팀이라고 생각했다.

 

4년 간 자신의 레이서였던 리처드가 은퇴를 결심했을 때에도 그의 나이나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를 생각하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겠거니 여겼던 스팍이다. 리처드 발더는 자신과 짝을 이루기 전에도 뛰어난 레이서였지만, 자신과 짝을 이룬 4년간은 감히 최고의 레이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눈부신 성적을 거둔 선수였다. 4년 연속 드라이버 챔피언십과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이룬 것은 물론이요, 4년간 수많은 기록을 새로 썼는데 특히 2시즌 동안 리타이어 없이 전 경기 완주 및 포인트 득점은 수많은 사람이 인정할 정도로 쉽게 깨기 힘든 기록이었다. 앞으로도 몇 시즌은 리처드가 계속 지배하리라는 예상이 팽배하던 가운데 그가 은퇴를 결심했을 때, 엔터프라이즈 팀에서 유일하게 그 결정을 반대하지 않은 게 바로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였던 스팍이었다.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말이 그런대로 합리적이었던 까닭이다.

 

리처드 이후 자신과 짝을 이룰 레이서가 F1을 시작한 지 고작 일 년도 채 안 된 햇병아리 루키인 것은 그런대로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이 아까우니 잘 키워보라는 파이크 감독의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들보다 늦게 카트를 시작한 것 치고 F1 데뷔는 빨리 했지만 제임스 커크의 재능은 거기까지였다. 제임스 커크는 스타팅 그리드와 상관없이 경기 초반이면 하위권으로 순위가 떨어지곤 했다. 규정에 따라 만들어진 차량의 성능은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이미 정해진 트랙 위를 달리는 동안 날씨라는 변수가 없다면 숙련된 드라이버의 움직임은 대부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 초반 순위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좋은 순위를 거두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았다. 게다가 제임스 커크는 차량 조작도 미숙해 보였다. 비도 오지 않는 날씨에 브레이크의 제동력을 감당 못하고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그러다 사고라도 낸다면 전체 레이스를 예측하기가 까다로워지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더 빨리 분석하는 스팍이라도 경기 중 사고는 까다로운 변수였다. 우승후보인 리처드에게 백 마커를 도맡아하는 제임스 커크의 존재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다행히 운전 미숙으로 사고를 낸 적도 없고 경기 후반에는 어떻게든 순위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아버지인 조지 커크가 F1 데뷔 첫 해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졌다는 걸 감안하면 제임스 커크는 소박한 데뷔 시즌을 보낸 평범한 선수에 불과했다.

 

“대답이 없다는 건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석상처럼 무표정한 스팍을 보며 파이크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냈다. 스팍은 파이크의 그런 미소를 볼 때마다 바보가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처음 스팍이 파이크와 대화를 나눴을 때도 파이크는 대답 없이 저런 표정만 지었다. VSA 소속 드라이버였던 스팍이 파이크를 만난 건 세컨드 드라이버로서는 나름대로 인정을 받지만, 한편으로 그 이상을 꿈꿀 수 없음에 고민하던 5년 전이었다. 시상식을 겸한 연말 파티에서 우연히 그 해의 감독상을 받은 엔터프라이즈 팀의 크리스토퍼 파이크 감독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축하의 말과 함께 가볍게 근황을 나누던 중 파이크 감독이 더 오래, 더 깊게 레이싱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냐고 물었다. 처음엔 이적과 은퇴를 놓고 저울질하던 제 마음을 읽기라도 했나 싶어 놀라던 스팍은 곧 그 뒤에 숨은 ‘드라이버보다’라는 말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현역으로 활동하며 기량이 떨어지지 않은 선수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파이크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웃고 자리를 떠났었다. 실제로 스팍은 지금 파이크 밑에서 선수 시절보다 더 즐겁게 레이싱을 하고 있었다. 리처드의 은퇴 이후 수많은 러브콜이 있었지만 스팍은 파이크 밑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제임스 커크라니.

 

“자네, 짐의 경기를 제대로 본 적은 있나?”

 

이제 원로 취급을 받을 정도로 오랫동안 F1에 몸담고 있는 파이크의 목소리는 어쩐지 자신을 놀리는 듯 했다.

“없습니다.”

“일단 짐의 경기를 보고, 그러고도 도저히 납득이 안 되면 그때 거절해도 늦지 않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말에 스팍은 파이크가 건넨 자료가 담긴 마이크로 칩을 받아들고 조용히 사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제임스 커크는 엔터프라이즈의 세컨드 팀인 패러것에서 데뷔한 루키였다. 데뷔라고는 하지만 시즌 초부터 합류한 선수는 아니었다. 패러것의 선수였던 올슨이 시즌 중 사고를 당해 대신 출전한 선수가 제임스 커크였다. 올슨은 부진한 성적임에도 경기에 임하는 태도가 좋지 않아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다. 올슨이 은퇴하는 계기가 된 그 사고 역시도 시즌 중 한 달여의 휴가 기간 동안 다음 경기가 열리던 근처 휴양 행성에 놀러갔다 당한 사고였다. 팀 운영 측면에서도 발전 없는 선수보다야 화려한 배경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실력이 검증 안 된 루키 쪽이 훨씬 나은 탓에 선수 교체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파이크가 건넨 건 제임스 커크의 데뷔전인 2251년 델타 베가 레이스의 자료였다. 델타 베가 프로즌 서킷에서 치러지는 경기는 수시로 눈보라가 이는 행성의 날씨 탓에 거의 빙상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충분한 차량 세팅 변경 시간이 필요하다는 각 팀의 요구에 따라 델타 베가 레이스는 언제나 여름휴가 다음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사고가 속출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로 유명한 델타 베가 레이스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그 유명한 조지 커크의 아들이 데뷔전을 치른다고 하니 그 관심은 더욱 치솟았다. 수많은 언론 관계자들이 참석했고, 커크 가와 친분이 있던 파이크 감독은 경기 전부터 인터뷰를 하느라 바빴다.

 

제임스 커크가 데뷔하던 해인 2251년에는 유독 엄청난 눈보라로 퀄리파잉이 몇 시간이고 미뤄졌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치러진 퀄리파잉은 예상대로 난장판이었다. 24명의 선수 중 6명이 사고로 퀄리파잉 기록을 세우는데 실패했고, 패러것의 게일라 선수는 차량 이상으로 퀄리파잉에 실패했다. 같은 팀 선수였던 제임스 커크는 루키답게 초반 몇 바퀴 동안은 휘청거리며 위험한 주행을 했지만 몇 바퀴를 돌면서 감을 잡은 모양인지 무려 9번 그리드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퀄리파잉을 마친 제임스 커크는 볼이 상기된 채 아직 소년의 얼굴을 하고 활짝 웃었다. 인터뷰 내내 빙하처럼 푸른 제임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고작 9번 그리드에도 만족할 수 있는 건 아직 어린 선수이기 때문일까. 열여덟 살. 10년 전 스팍이 데뷔할 때와 같은 나이였다. 스팍은 자신의 선수 시절을 떠올렸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스팍은 웃음커녕 미소 한 번 지은 기억이 없었다. 한 번도 자신의 주행에 만족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선수였던 리처드는 첫 번째 코스가 좌측 커브인 델타 베가 프로즌 서킷에서는 폴포지션보다 유리할 수도 있는 위치인 2번 그리드였다.

 

다행히 본 경기 때는 눈보라가 내리지 않았다. 날씨의 영향이 사라지자 선수들은 제 실력을 뽐냈다. 9번 그리드에서 출발한 제임스 커크는 출발부터 순위를 잃더니 서킷을 몇 바퀴 돌지도 않았는데 벌써 백 마커가 되어 있었다. 부모의 후광을 입고 제 실력 이상의 평가를 받는 선수라면 스톤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실망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스팍은 자신이 무엇에 실망했는지 알지 못했다. 당시 리처드의 순위 싸움이 치열해 제임스 커크의 레이싱에 관심을 줄 여유는 없었지만, 경기 종료 후 최종 순위를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놀랐던 기억이 났다. 제임스 커크가 백 마커였던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위를 회복해 비록 출발 그리드보다 한 계단 떨어지긴 했어도, 포인트 득점이 가능한 10위로 경주를 마쳤기 때문이다.

 

제임스 커크가 초반에 순위를 상실한 건 놀랍게도 제대로 가속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임스가 본격적으로 가속을 시작한 타이밍은 백 마커가 되어 선두권이 자신을 앞지르기 시작할 때였다. 레이스 페이스를 높이기 위해 순위가 앞서는 차량을 뒤따라가는 전략은 흔한 전략이지만, 그것을 자신의 주요 전략으로 사용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차량마다 성능과 특성이 다른 만큼 남을 따라가기만 해서는 제대로 된 레이스를 할 수 없었다. 제임스의 전략은 비논리적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 제임스 커크의 퀄리파잉 기록을 살피던 스팍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커브가 이어지다 직선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오면서 가속 시 제임스의 차량은 기어 변속 딜레이를 일으켰다. 기어 변속에 딜레이가 생기면 코너를 빠져나오는 속도가 부족해 코너에서 순위 싸움에 휘말릴 경우 반드시 지고 만다. 다수의 차량과 자리싸움을 벌이는 경우 후속 차량과 충돌 위험도 있었다. 제임스 커크는 퀄리파잉 초반에 이를 인지한 듯 퀄리파잉 내내 커브 진입 속도를 높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보통 커브 진입 시 속도를 줄이고 커브 탈출 시 속도를 높이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제임스는 커브 진입 시 속도를 높이고 커브 탈출 이후 서서히 속도를 높이는 이상한 방식의 주행으로 안정적인 랩타임을 내고 있었다. 당시 서킷에 쌓인 눈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는 코너 진입 시 스핀을 줄이려 과도하게 속도를 줄이는 경향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코너 진입 속도가 높은 제임스는 최고 속도가 높지 않음에도 비교적 괜찮은 랩타임을 낼 수 있었다. 짚이는 게 있어 제임스의 팀원인 게일라의 퀄리파잉 기록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게일라의 리타이어 원인은 기어박스 이상이었다. 기어 변속 딜레이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변속을 하다 기어가 고정되어 버렸던 것이다. 올슨은 차량을 험하게 다루는 편이었고, 제임스가 투입된 시즌 하반기에는 이미 기어박스 교체 횟수 초과로 차량의 기어박스를 교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 최하위 그리드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정상적인 차량으로 주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제임스 커크는 퀄리파잉을 통해 익힌 자신의 레이스 전략을 믿고 이상이 있는 기어박스를 교체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 레이스 초반에 가속을 하지 않은 이유도 초반부터 순위싸움으로 치열하게 몸싸움을 하다 충돌이 발생할 위험을 인지하고 이를 피했다고 보는 게 적절했다. 차량 상태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주행을 하다 리타이어를 당하느니 안전하게 포인트를 획득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순위 회복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서야 선택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흥미롭군.”

 


오랜만에 읽으니 재미있어서 예전에 썼던 F1 AU의 뒤를 조금 이어 보았다. F1은 잘 모르지만 어차피 가상의 경주니 대충 그럴싸하게만 쓰자는 생각이다. 이제 보니 스팍과 커크가 10살 차이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 그래도 클리셰 범벅인데, 나이차도 흐뭇하구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했다, 과거의 나. 완결만 내면 참 좋은데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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