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omise by coffee666
207872 words
호기심 가득한 벌칸 외교관의 자녀 스팍은 8살 때 부모님과 함께 지구를 방문했다가 동갑내기 소년 제임스 커크를 만난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점 가까워진 둘은 좋은 친구로, 평생을 약속한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짐이 Tarsus IV에 간 뒤로 어쩐지 연락이 뜸해지더니, 스팍이 본딩을 통해 짐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았을 때 이미 짐은 크나큰 상처를 입은 뒤였다. 짐은 자신의 망가진 모습에 당황하는 스팍에게 이별을 고하고 짐을 잊지 못해 방황하던 스팍은 벌칸을 떠나 스타플릿에서 조금씩 이별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스팍을 스타플릿으로 이끌었던 파이크가 임무 중 스팍을 보호하다 큰 부상을 입어 함장직에서 물러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스팍은 새로운 함장을 맞이함과 동시에 일등 항해사로 승진까지 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 함장이…!
뭐, 당연하게도 그 함장은 제임스 커크고 그리하여 둘은 또 알콩달콩 잘 된다는 그런 내용이다. 고전 추리물도 그렇지만, 내가 호모 로맨스를 좋아하는 이유도 어떤 역경이든 주인공 둘이 이겨내고 잘 될 것을 믿고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새드 엔딩 반대요)
coffee666님은 요즘 주목하고 있는 작가분 중 한 분인데 감사하게도 번역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번역해도 좋다고 허용해 주신 분이다. (나는 Blanket Permission이 있는 글 중에서 번역할 글을 고르는 편이다.) 내가 그동안 소개한 팬픽 중 가장 긴 팬픽이 아닐까. 길이가 길이인지라 아주 꼼꼼하게 읽진 않고 적당히 스킵을 섞어가며 읽긴 했다.
이 소설은 귀엽고 달달하게 시작하다가 짐이 스팍에게 이별을 고할 때쯤엔 앵슷이 폭발하더니, 다시 만난 뒤에는 쌍방삽질도 하다가 또 달콤하게 끝나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맛이 있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건 바로 짐과 스팍의 이별 장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딱 그 장면만 옮겨 보았다.
“짐,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줘.”
조금은 절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여기가 그리울 거야.”
짐이 두 팔로 제 몸을 감싸며 바닷바람에 몸을 살짝 떨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스팍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지구에 조금 더 있을지도 몰라. 학교가 예전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 관점을 바꾸면 우선순위도 바뀌잖아. 그렇지 않아?”
“흠”
짐이 멈췄다. 시선을 떨군 채로.
“머리는 어때?”
스팍이 뒷짐을 지며 물었다.
“흠…”
짐이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괜찮은 것 같아. 너는?”
“괜찮아. 짐, 내가 사과할…”
“하지 마.”
짐이 한 손을 들었다.
“그냥… 하지 마. 이해하니까. 내가 너한테 마인드멜드를 하겠다는 소리까지 하게 만들었잖아. 넌 힘들어 할 줄 알았어.”
“하지만 …”
“알아.”
짐이 한숨을 쉬었다.
“근데 안 그랬으면 좋겠어.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 걱정도 할 필요 없어.”
“어떻게 네 걱정을 안 해.”
짐이 크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이 상황이… 너무 힘들어. 전부 다. 너무 지쳐. 항상 널 생각해야 한다는 게 너무 지친다.”
“무슨 뜻이야?”
스팍이 눈을 찌푸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뭐든 항상 우리잖아.”
짐이 또 한숨을 쉬었다.
“방학을 하면 너한테 가. 일이 생기면 너한테 말해. 너도 그렇잖아. 넌 하루에 내 생각을 얼마나 해?”
그제야 짐이 스팍을 바라보았다. 스팍은 짐의 파란 눈동자에 깜짝 놀라며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했다. 그 와중에도 내심 짐의 안색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팍도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네 생각이라면 언제나 하지.”
짧은 대답이었다.
“그게 문제야.”
짐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너무 심하지 않아? 내가 없으면 그때만이라도 내 생각을 안 해야 하잖아. 네가 원하는 다른 일을 하라고.”
“무슨 뜻인지 확실히 설명해 줘.”
스팍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단호한 말이었다.
“그냥… 그게 더 편할 것 같아. 난 이제 널 생각하는 게 힘들고, 너도 날 생각하면 힘들 거 아냐.”
“아니, 절대 안 그래.”
스팍의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논리의 힘을 빌려 감정을 가라앉혔다.
“널 만난 날부터 매일 널 생각했어. 난 그것밖에 모르고 다른 건 하고 싶지가 않아.”
“너도 이제 달라져야지!”
새된 목소리였다.
“난 이제 네 옆에 못 있어. 우린 항상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지잖아. 항상. 차라리 이러는 게 나아. 그냥 깔끔하게 헤어지자.”
“난 계속 기다릴…”
“하지 마!”
짐이 스팍에게 달려들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변명이든 논리적인 이유든 다 듣기 싫다고.”
“아무래도 난… 네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
스팍은 있는 힘을 다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뒷짐을 지고 있는 손을 어찌나 꼭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였다.
“차라리 이게 나아.”
짐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짐은 스팍이 미처 보기도 전에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헤어져야 돼. 내가 지금 이 꼴로 어떻게 네 옆에 있어.”
“그럼…”
스팍이 치밀어오는 감정을 삼키느라 눈을 꼭 감았다.
“그럼 우리 약속은? 그것도 어길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짐이 떨며 다시 눈물을 훔쳤다.
“영원히 서로 사랑하겠다는 약속 말이야.”
스팍은 그때의 약속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서로 약속했잖아. 죽는 날까지 곁에 있겠…”
“스팍, 유치하게 왜 그래!”
짐이 다시 한 번 스팍에게 달려들었다.
“넌 정말 그걸 다 진심이라고 생각한 거야? 우리 둘 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이었잖아! 진짜 세상이 뭔지도 모르는 애들이었다고!”
“그래도 난…”
“그럼 이제 꿈 깨야겠네! 끝났어! 스팍, 끝났다고!”
짐이 떨리는 숨을 삼켰다. 꾹꾹 눌러 참은 울음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짐은 길게 늘어진 스웨터 소매로 얼굴을 꾹꾹 눌렀다.
“그냥… 날 잊어.”
“네가 그러면 어떡해.”
스팍도 짐만큼이나 참아 온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숨을 쉬어봤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팍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물이란 것이 눈에 고이는 느낌은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지도 몰랐다.
“짐, 제발 이러지 마.”
“언젠가는, 너도 이게 최선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짐이 해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스팍의 몸은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짐을 쫓을 수 없었다. 멀리 어떤 형체가 나타나는 게 보였다. 아들을 데리러 온 위노나 커크였다.
“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고통으로 미처 소리도 내지 못한 스팍의 목소리를 삼켜 버렸다.
“넌 괜찮을 거야. 그럴 거라는 거 알아.”
짐은 계속 걸어갔다.
스팍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눈물을 참으려 애쓰던 노력이 그 힘을 잃더니 스팍의 바다가 온 얼굴을 뒤덮었다.
짐이 더 멀어지기 전에 스팍이 겨우 손을 뻗어 짐의 팔뚝이 손가락을 스치기까지 했건만 짐은 스팍을 쳐내고 계속 걸어갔다.
“미… 미안해. 차라리 이러는 게 나아.”
짐의 목소리는 바람소리에도 사라질 정도로 작았다.
저 멀리 해변 끝에선 물안개가 장막을 쳤다. 짐이 멀리 서 있던 실루엣에게 다가갔고 에너자이징 한 번 만에 전부 사라져 버렸다. 스팍을 돌아보는 일조차 없었다.
파도가 무너져 내리는 스팍을 위협하듯 다가와 부서졌다. 손과 무릎이 젖은 모래에 파묻혔다. 얼굴을 감싼 가운 소매에 스팍의 울음소리가 사그라졌다.
부서지는 파도가 울음소리를 지웠다. 이번에는 파도가 밀려와 스팍의 신발을, 가운 자락을 적셨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때까지 스팍은 억장이 무너진다는 인간의 표현을 이해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숨을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스팍의 심장이 산산이 부서졌다.
코엘키가 스팍을 위로하듯 다가와 뽀송한 옆구리를 바싹 대고 비비며 크게 가르릉 울었다. 우느라 눈물에 눈이 아팠다.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스팍은 혼자 웅크린 채 텅 빌 때까지 울었다.
스팍이 일어나 앉자 코엘키가 무릎 위로 올라왔다. 스팍이 눈을 훔치자 젖은 모래가 얼굴에 들러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여전히 몸이 떨렸다.
스팍은 지금만큼 스스로 외계인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인간이 아니라고 느낀 적도, 불완전하다고 느낀 적도. 스팍은 자신의 반쪽을 잃었다.
둘이 나눈 모든 것은 더 이상 짐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앞으로 둘이 무언가를 함께 나누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눈밭에서 놀던 일과,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서 자던 일, 악기를 연주하고, 체스를 두고, 한 이불을 덮고 숨결과 온기를 나누던 일들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얼마 전에 나누었던 입맞춤이 둘의 마지막 입맞춤이 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오래 할 것을. 아니, 영원히 끝내지 말 것을.
부서지고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스팍은 지구의 해변에 앉았다. 해가 완전히 사라져 어둠이 스팍을 감쌌다.
그럼에도, 무섭도록 확실한 건 스팍은 자기 자신의 상황에 슬픈 게 아니었다. 스팍의 머릿속엔 오직 짐이 가득했고, 스팍도 없이 잘 잘 수는 있을지가 걱정될 뿐이었다.
스팍은 눈을 감고 파도 소리에 귀를 닫은 채 둘을 잇는 정신의 끈을 찾았다. 스팍은 또 한 번 숨죽여 울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적 말고는.
단절됐기 때문에 오는 정적인지, 그저 스팍 자신이 정신적으로 탈진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코엘키가 스팍의 가슴을 앞발로 꾹꾹 눌러댔다. 발톱이 바늘처럼 피부를 찔렀지만 가슴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또 다시 파도가 밀려와 스팍과 코엘키를 적셨다. 스팍이 겨우 일어서자 코엘키가 스팍의 어깨 위로 올라탔다. 스팍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벌칸에도 미래는 없었고 이곳에도 삶의 이유가 없었다.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다. 두 행성에는 그저 모래뿐이었다. 지저분하고 아무런 형체도 없는 모래.
모래 생각에 스팍이 스스로를 고문하듯 고통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둘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다.
나는 원문에 비교적 충실하게 옮기는 편인데, 이번에는 분위기 전달을 위해 문장을 끊기도 하고 붙이기도 하고, 때로는 의역꼼수도 구사했다. (아니 어쩌다 전부 어떻게/어떡해 뿐이냐고 ㅋㅋㅋㅋ)
Jim stopped, keeping his eyes down.
짐이 멈췄다. 시선을 떨군 채로.“I will always worry about you.”
“어떻게 네 걱정을 안 해.”“We need to break up. I’m too messed up for you right now.”
“헤어져야 돼. 내가 지금 이 꼴로 어떻게 네 옆에 있어.”” You cannot do this.”
“네가 그러면 어떡해.”
의역한 부분을 뽑으려고 봐도, 별로 없네.
You cannot do this를 ‘네가 그러면 어떡해’로 옮긴 건 그냥 직역인데, ‘네가 이러면 안 되지’가 아닌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다. 나에게 이 소설의 스팍은 벌칸인이면서도 짐에게만큼은 단호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스팍이기에 명령조의 말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성격이 드러나는 쪽을 택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해석일뿐이지만.
브금은 가사만 들으면 이 장면과 느낌이 꽤 비슷한 H.O.T.의 4집 수록곡 ‘영혼(Soul)’
떠나가라고 내 말 안 들려
내게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떠나가
제발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이번 한번만 내 말을 들어
네가 왜 나를 잊어야만 하는지
내가 이런 말을 하면서 왜 눈물을 흘리고만 있는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줘
널 사랑해
날 용서해 줘
사실 너를 이해 시킬 수 없었어
날 떠나가 줘 제발
아무 것도 알려하지 말고
왜 네게 말을 못해 이젠
다신 그대를 볼 수 없다고
널 떠나 보내야 하는 나의 맘도 미치겠어
곧 발매 20주년이 되는 노래지만 가사가 어쩜 이리 찰떡인지. 이것이 바로 클리셰의 매력.
이건 여담.
요즘 여러 분야에서 PC(political correctness)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보이는데, 언어에서도 오래 전부터 그런 움직임이 있어 왔다. 영어의 경우 fire man 대신 fire fighter를, stewardess나 steward 대신 flight attendant를 사용하고, 기혼 여성과 미혼 여성을 따로 부르는 Mrs. 와 Miss의 사용을 배제하고 Ms.를 사용하는 것 등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지지부진한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대명사의 사용이다. 내 적은 경험으로 봐도 제3자를 지칭하는 단수형 중성 대명사가 없는 언어가 많다. 영어만 해도 사람에게 it을 사용하는 건 갓난아기에 한정되고, 제3자를 지칭할 때는 남성을 가리키는 ‘he’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가 대명사 ‘they’의 사용이다.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하면, 짐이 엔터프라이즈에서 스팍을 다시 만난 뒤 본즈에게 내가 예전에 사귀던 사람이 있다고 고백하는 바로 이 장면 때문이다.
“You remember how when we first met I told you about that… person I was dating?”
“Yeah?”
“Well,” Jim glanced down. “They’re here.”
‘he’나 ‘she’가 쓰여야 할 곳에 ‘they’가 오니까 위화감이 확 드는 게, 외국인인 나도 어색한데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낯설까. 이미 익숙한 것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익숙해진 옳지 않은 것들을 낯설지만 올바른 것으로 바꾸려 노력하고, 또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이 조금씩 좋아진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