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안 난다니 어떤 기분이야? 마음이 안 아프다니 어떤 기분이냐고. 널 낳아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복수하고 싶지도 않아?
씁쓸한 말이었다. 뭔가 반응해주길 바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스팍에게 악을 쓰긴 했지만 그 악다구니는 스스로에게 고통스럽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이 된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이 청명한 날에 남자는 그 이유를 내려다보았다.
위노나 M. 커크
사랑스런 아내이자 어머니
USS 파라거트 일등 항해사
임무 중 사망
“엄마”
이 순간 남자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남자는 알았다. 워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남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알았다.
“나는 네 아버지 뒤를 따를 거야, 지미. 우주에서 죽으면 네 아버지랑 늘 함께 있겠지. 막을 생각은 하지도 마.”
어머니가 늘 하던 말이었다. 어머니는 소원을 이뤘다. 블랙홀이 한 때 벌칸이었던 행성 근처를 전부 삼켜버렸고, 시신은 한 구도 찾지 못했다. 내세가 있다면 그게 어디든 위노나 커크와 조지 커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의 부모님은 순직했다. 우주가 이제 남자의 차례라고 하는 날이 온다면, 남자도 그러길 바랐다.
남자는 유리로 된 묘비를 바라보았다. 수백 개는 되는 묘비가 있었다. 스타플릿 사관학교 사령부 건물을 둘러싼 작은 공원은 묘지로 변했다. 수개월 전에 전혀 다른 목적으로 벌칸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검붉은 기둥은 작은 언덕 위에 의연히 서 있었다. 한 면에는 벌칸어로 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북반구에는 봄이 완연했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해가 내리쬐는 묘지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몇몇 아가씨는 나무 옆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남자는 그 모습에 마음이 쓰였다. 지나가다 아무 묘비에 있는 이름을 읽어도 거의 다 남자가 아는 사람일 터였다. 세 줄 너머 다른 급우 두 명 곁에 안치된 명랑한 오리온 아가씨인 게일라와는 몇 번 잠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남자는 경사진 공원을 내려다보았다. 이때까지 남자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정말 아무런 의미도. 이 모든 사람들 때문에, 벌칸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 때문에 답지 않게도 남자는 우울했다. 이제 현실이 된 사실이 남자를 덮쳤고 조금 두렵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했다.
“커크?”
남자가 돌아보았다. 밝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우후라가 손으로 해를 가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우후라”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몸을 돌렸다. 우후라와 달리 남자는 여전히 붉은 교복을 입은 채였다. 우후라의 왼편에는 검은 정복을 입은 스팍 중령이 섰다. 스팍은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어두운 눈동자로 커크를 바라보았다. 나라다를 파괴한 뒤로 커크는 스팍의 태도가 변했으면 했지만 굳은 스팍의 어깨를 보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커크가 한 말 때문에 여전히 커크를 목 졸라 죽이려 해도 스팍이 커크 탓을 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커크는 다시 우후라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게일라 때문에 많이 힘들겠다.”
우후라는 어두운 표정으로 친구의 이름이 새겨진 반짝거리는 유리 묘비가 있는 언덕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너도 게일라랑 친했잖아. 사실 나 조문 온 거야.”
“나도 그래.”
우후라가 다가와 커크 바로 앞에 놓인 묘비를 바라보았다. 묘비를 읽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우후라는 눈을 크게 뜨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떡해, 힘내.”
커크는 엄마의 묘비를 돌아보았다.
“그래, 고맙다.”
어깨 너머로 본 스팍의 얼굴에 이해했다는 표정이 스쳤다. 미미한 변화였지만 연민이나 어쩌면 공감을 표하기에는 충분했다.
“Tushah nash-veh k’du.”
커크는 약간 인상을 구겼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당신과 함께 슬퍼하겠습니다.”
스팍이 번역해 주었다.
“아”
커크가 헛기침을 했다. 과하게 정중한 듯 했지만 벌칸인은 감정적인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고마워.”
스팍이 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게일라에게도 내 얘기 해 줘.”
우후라를 바라보던 커크가 침묵을 깼다. 우후라는 엷게 웃었다.
“그럼 중령, 자네도 이만.”
“네, 함장님.”
커크는 두 사람과 헤어졌다. 언덕을 내려가는 커크의 구두에 젖은 잔디가 들러붙었다.
…
화가 안 난다니 어떤 기분이야? 마음이 안 아프다니 어떤 기분이냐고. 널 낳아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복수하고 싶지도 않아?
스팍이 어렸을 때 많은 아이들이 스팍을 괴롭혔다. 그들은 스팍이 가진 약한 인간성을 결점이라고 했다. 스팍이 가진 모든 유전적, 환경적 문제의 원인이 그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커크, 그러니까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는 그 반대였다. 커크는 스팍이 가진 반쪽짜리 벌칸인을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벌칸 아이들에게 익숙해져 있던 스팍으로선 만난 지 채 하루도 안 된 커크가 그 짧은 순간에 불러일으킨 반응이 그들을 대할 때와 참으로 비슷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시신도 없는 어머니 무덤 옆에 선 커크를 보면서 스팍은 현재 커크에게 가졌던 적개심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 말들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뿐 스팍을 상처주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나이 든 자신은 말했다. 이제 스팍은 우후라와 언덕을 오르며 그 말들은 커크 자신이 느끼던 고통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씁쓸함이나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깊은 분노를 느끼기는커녕 스팍은 어렴풋이 커크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스팍? 괜찮아요?”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던 스팍은 우후라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물론입니다.”
스팍은 잠시 생각했다.
“커크 함장님에 대해 얼마나 압니까?”
“잘은 몰라요.”
두 사람은 평평하게 다져진 언덕 꼭대기에 도착했다. 벌칸에 나라다가 나타난 뒤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던 날짜가 수많은 묘비 한 가운데 새겨졌고 작은 분수가 그 위에 흩뿌려졌다.
“내가 알았던 함장님은 그냥 내가 만들어 낸 사람이었나 봐요. 함장님만 관련되면 굉장히 비판적이었거든요.”
우후라를 바라보았다. 당당한 여자였다. 우후라는 자신감도 있고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 우후라도 스팍만큼이나 성공한 사람이었다. 스팍은 우후라가 덮어놓고 비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우후라가 천천히 멈춰 서자 스팍은 생각을 떨쳐내며 두 사람 앞에 놓인 묘비를 내려다보았다. 스팍은 게일라를 한 번 밖에 만난 적이 없었다.
스팍이 알기로 커크의 부정을 도운 이가 게일라였다. 게일라는 학적부에는 기재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 생도… 함장의 범죄를 증언했다. 다른 생도들이 괴롭히는 와중에도 게일라는 놀랄 만큼 차분했던 오리온 여성이었다. 스팍과 마찬가지로 우후라의 룸메이트인 게일라도 편협하고 비열한 인물들에게 종족을 이유로 괴롭힘 당해서 힘들어 한다고 우후라가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어쩌면, 하고 스팍은 드레스에 풀물이 드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잔디에 무릎을 꿇는 우후라를 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최근 일어난 일들은 ‘인생은 짧다’는 인간의 표현을 설명해 줄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커크 함장은 첫인상이 전부인 사람은 아닐지 모르겠다고, 자신이 했던 일을 돌아보니 어쩌면 두 사람 다… 용서 받을 여지가 있는 것 같다고 스팍은 생각했다.
오늘 밤 스팍은 명상을 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는, 스팍은 친구를 생각하며 숨죽여 우는 우후라 곁에서 아무 말 없이 지키듯 서 있었다.
수정해 보니 오역이 상당했다. 어쨌든 예전보다 나아졌으면 다행이다. 그만큼 했는데 안 늘어도 문제긴 하지. I’m sorry는 지금도 옮기기 힘든 말이다.